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소의 난 (문단 편집) == 결말 == 황소군이 중국 남부를 휘젓고 있을 때, 아주 큰 실수 하나를 했다. 바로 군사를 주둔시키지 않은 것.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애초에 황소의 군대는 당나라 주력군을 피해서 전국 일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병력을 나누어 주둔시켰다면 각개격파 당했을 것이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군편제도 아니었기 때문에, 주둔병력이 흩어지거나 또 다른 왕을 자처했을지도 몰랐던 것이 현실.[* 이는 초한지 시대를 개막한 진승 오광의 난 때 그대로 나타났었는데, 혈통이 매우 중시 됐던 전근대시절에 민초에 불과했던 진승과 오광은 권위라는 게 없었고 군사를 나누는 족족 장수들이 독립을 해버렸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황소군이 떠나면 다시 관군이 찾아왔고, 결국 황소군이 장안에 눌러앉았을 땐 이미 사실상 포위상태가 된 것이다. 사실 황소군은 계속 움직여야 유지되는 상황이었으며 수도인 장안을 점령했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 눌러앉은 것은 전략적 실책이었던 셈이다. 황소는 매우 당황한다. 더군다나 경제적 기반마저 갖지 못한 상황이라 황소의 제국은 너무나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특히 당나라 조정이 각 지역에서 급히 병사들을 징발하여 반격에 나서자 안 되겠다 싶었던 황소는 그의 심복, [[주전충|주온]](朱溫)을 출병시켜 관군을 격퇴해보고자 한다. 하지만 주온은 당나라에 깔끔히 투항해 버린다. 이에 황소군의 정세는 극도로 악화되고 [[투르크]]계 [[사타족]] 출신의 장수 [[이극용]](李克用)을 비롯한 토벌군에 의해 결국 황소군은 3년간의 항쟁 끝에 장안을 내버리고 탈주한다. 황소군은 하남성 일대로 파고 들어가 투쟁을 계속했지만 884년 진주(陳州, 하남 회양)에서 관군에게 대패하며 태산 낭호곡(狼虎谷)에서 황소가 자결하면서 반란은 끝을 맺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